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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의 포도밭 by 이반 일리치

독서의 즐거움

by 하나비+ 2020. 12. 13.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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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가 죽었다고?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으려고 도서관을 찾았다. 도서검색 PC에서 '이반 일리치'를 검색하니 여러 출판사에서 번역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목록에 뜬다. 출판된 지 2년된 책을 클릭. 최신 도서일수록 책 상태가 좋을 것 같다. 책 위치를 출력하면서 보니 이반 일리치가 저자인 책이 있었다. '텍스트의 포도밭'. 이름이 왠지 형이상학적이다. 이반 일리치가 죽었다는데, 생전에 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 궁금해졌다. '텍스트의 포도밭'도 위치를 함께 출력해 책을 찾으러갔다. 

 

출처: 네이버 책

 

원작 언어의 습격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텍스트의 포도밭' 두 권의 책을 빌려 도서관에서 나왔다. 근처 카페에 앉아 무슨 책을 먼저 읽을 지 3초 고민 후 '텍스트의 포도밭'을 폈다. 저자 소개글을 읽어보니 이반 일리치는 철학자이며, 사제이고, 옛날 학자들이 그러하듯 많은 직업을 가졌다. 급진적인 사상이 돋보였다고 하니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생각하고 비평하는 사상가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본문 페이지를 넘겼다.

 

첫 몇 페이지는 원작에 쓰인 단어가 꽤 많이 등장했다. 아마 이반 일리치가 사용했던 단어를 한글 단어로 번역하자니 원문의 의미를 그대로 살리기 어려워서 저자가 원어를 그대로 사용한 것 같았다. 단어가 처음 나왔을 때는 그 단어의 의미를 설명해주기 때문에 문맥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단어가 2페이지 가량 뒤에 또 나오면 단어의 의미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아 단어 설명을 다시 찾아봐야하는 일이 생겼다. 이 작업이 계속 되다 보니 점점 내가 읽고 있는 문장, 문단의 의미가 모호해지면서 동시에 책을 읽는 속도가 느려졌다.

 

한참을 앞뒤로 들척이면서 읽다보면 피로가 몰려온다. 커피를 부르는 책이다 진짜. 중반부쯤 넘어가면서 원어단어의 사용이 줄어들고, 내용을 조금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 고대의 지식(진리)와 사람사이 관계

고대에서 지식(진리)는 구전되었다. 지식은 대자연 그 자체이고 진리이자 빛이었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말(시, 노래)로 전달하면 학생들은 그것을 받아적었다. 교사의 말은 매 수업마다 달라지고, 학생들의 필기도 제각기였지만 그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말과 글은 지식(진리)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배운 지식(진리)를 읊고, 음미하며 스스로 신앙과, 지혜, 지식의 길을 찾는 것이 학생의 본분이었다. 

 

당시 '읽기' 행위에는 '말하기' 행위가 수반되는 것 당연했다. 무언가를 읽는다는 것은 글을 소리내어 읽는다는 것을 뜻했다. 수사들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기간에 묵언수행을 했는데 이는 문득 '말하기' 행위를 금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읽기' 행위, 즉 학습 행위 자체를 금한 것이다. 체벌의 한 형태로 학습이 금지된 것이다. 읽고, 학습하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신성시 되었는가를 느낄 수 있는 한 대목이었다.  

 

 

카페에서 커피냄새 맡으며 책읽는 시간

 

◆ 알파벳 혁명과 사회변화

 

사람들은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원본 책을 필사하여 여러 권의 사본을 만들다가, 활자가 생겨나기 시작할 무렵부터 종이에 인쇄해서 대량으로 찍어냈다. 양피지에 적혀있던 소수만을 위한 책이 값이 저렴한 종이에 잉크로 찍혀 유통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알파벳 혁명은 우리 사회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신성시된 진리로서의 책은 무게가 가볍고, 한 손에 잡히는, 언제라도 서점에서 한 권 살 수 있는 대중화된 종이 위의 활자로 대체되었다. 고대의 언어는 지식을 설명하는 도구로서의 의미를 가졌었다면 책의 등장으로 지식이 언어의 틀 속에 갇히게 되었다.

 

텍스트의 등장으로 일상 언어도 표준어와 방언이 나뉘어지고 맞춤법이 보다 발달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소리내지 않고 읽는 묵독이 처음에는 별나고 신기한 것으로 받아들였는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묵독을 받아들였다. 오늘날, 글을 배우는 어린 아이가 아니라면 묵독이 보편적인 읽기 방법이 되었다. 

 

 

책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 진리의 보편화에 대한 생각

 

이반 일리치는 고대의 낭만적인 지식(진리)과 인간의 관계를 그리워한다. 진리의 무결함과 그것을 좆는 구도자의 자세를 높이 평가하는 그의 생각은 대단히 가치있다고 생각한다. 알파벳 혁명은 이것을 다 무너뜨렸다. 하지만 지식은 그 덕분에 보편화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보편화된 지식은 더이상 고대의 신성한 진리 그 자체로서의 지식은 아닐 것이다. 진리의 무결성, 엄밀성이 사라지면 그것은 더이상 진리가 아니게 될까? 매우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진리가 다른 성질의 것으로 완전히 변질되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단순히 진리의 농도가 희석되는 형태일 수도 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알파벳 혁명 이후 출생자, 특히 인터넷 세대는 지식의 중요성을 낮게 평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구글 검색 한번에 몇 만 건씩 쏟아져나오는 지식을 음미하고 곱씹는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이반 일리치는 어쩌면 지식의 범람으로 인하여 진리를 추구하는 정신 자체가 소실되는 것을 우려했던 것일 수 있다.  

 

이반 일리치의 '텍스트의 포도밭'은 지식은 책과 텍스트 그 자체라고 생각했던 내 관념을 제대로 깨뜨린 책이다. 지식과 진리와 신앙의 역사적 흐름을 이반 일리치의 독창적인 해석틀로 바라볼 수 있어 매우 흥미로웠다.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다 읽고난 다음에야 두 이반 일리치는 동명이인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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